고구려 세운 동명왕~♬
title : 1971년_중묘 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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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중요도 | 명성 | 매력 | 특기 |
★★☆ | ★★ | ★★ | 건국, 통치 |
기원전 58년 4월 ~ 기원전 19년 9월
고구려 초대국왕
고구려의 초대 국왕으로 전해지는 인물이다.
보통 주몽과 동명을 동일시하지만 연남산 묘지명(702년)에서는 다른 인물로 보고 있다.
고구려가 존재했던 삼국시대 때까지는 동명과 주몽이 별개였으나 고려시대 이후 시점에 부여의 동명왕과 고구려의 동명성왕(주몽)이 동일시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주몽 탄생 설화를 보면 부여의 금와왕이 태백산 남쪽의 우발수를 지나가는데 울고있는 한 여인을 만났고 울고있는 연유를 물었다. 그 여인은 하백(강의 신)의 딸 유화였는데 부모님 몰래 해모수(하늘의 신)와 결혼을 했고 얼마지나지 않아 해모수가 하늘로 가서 돌아오지 않았고 이 사실을 알게된 부모님이 쫓아내서 울고 있었던 것이었다.
유화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금와왕은 유화를 궁으로 데려왔고 얼마 후 유하는 임신을하고 출산을 하게되었는데 유화가 낳은 것은 사람이 아닌 알이었다. 그 알에서 태어난 아이가 주몽이었다.
주몽은 어려서부터 지혜롭고 용감하였고 특히 활쏘기를 잘하였다. 주몽이 뛰어나자 부여의 왕자들이 시기하여 괴롭혔고 나중에 왕자들이 주몽을 죽이려하자 주몽은 말을타고 도망가게 되었는데 강을만나 안절부절하고 있는데 할아버지 하백이 주몽이 강을 건널 수 있도록 물고기와 자라로 다리를 만들어주었고 무사히 강을 건넌 주몽은 압록강 근처 졸본이라는 곳에 이르러 터를 잡고 고구려를 건국했다고 한다.
동명왕은 부여의 시조다. 또한 고려시대 이후의 문헌에서 고구려의 시조 주몽(추모)를 지칭하는 명칭이기도 하나 현재 역사학에서는 주몽(추모)과는 다른 인물로 여기고 있다.
고려시대 이후의 문헌에서는 동명왕과 주몽을 같은 인물로 여기고 두 사람을 구분하지 않았지만, '광개토대왕릉비' 및 '모두루 묘지명' 등 고구려의 금석문에서 자신의 시조를 오직 주몽(추모)로 표기하고 있을 뿐 동명이라 한 예는 없고, 고구려 당대 인물인 '연남산 묘지명'에서는 동명과 주몽(추모)을 서로 다른 사람으로 구분하고 있다고 한다.
동명 성왕(주몽, 추모, 중모)은 고구려의 시조인듯하고
동명왕은 부여의 시조인듯한데....
동명왕과 동명성왕은 정말 다른사람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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