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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문익점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by 디렉터 K 2023. 7. 25. 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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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화씨는 문익점~♬

삼우당 문익점 영정

 

별점

역사적 중요도 명성 매력 특기
★☆ ★★ ★★☆ 재배, 유통

 

연대

1329년 ~ 1398년

 

업적

목화씨 도입하여 재배에 성공하고 대중화 시킴

 

스토리

여말선초의 유학자, 정치인, 관료, 학자보다는 '원나라에서 목화씨를 가져온 사람'으로 더 유명하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려던 시점에 목화의 보급으로 조선의 의복 문화는 물론 상거래 관행에도 큰 변화를 가져온 시발점이다.

 

원 간섭기 와중인 1329년(충숙왕 16년) 경상도 진주목 강성군(현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배양마을)에서 아버지 문숙선(文淑宣)과 어머니 함안 조씨 사이의 4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문익점의 아버지 문숙선은 과거시험에는 합격했으나관직에는 나가지 않은 선비였다. 문익점은 8살때부터 아버지에게 글을 배우고 12살때부터 당대의 학자 이곡(李穀)의 제자가 되어 그 아들 이색과 함께 공부했고 1360년(공민왕 9년) 경덕재생(經德齋生)으로서 경자방(庚子榜) 문과에 응시하였는데 이 때 병과 4위로 급제하면서 관직을 시작하게 되었다. 여몽전쟁 이후 원나라의 간섭을 받던 고려는 공민왕 연간 원나라가 쇠약해지자 위해 반원 자주 정책을 시작했다. 그러나 중국 대륙 본토에서 원나라를 몰아내고 한족 부흥을 내세운 홍건적이 원나라뿐 아니라 고려 영토까지 침범해 공민왕이 안동으로 피난을 가는 사태까지 발생하자 적의 적은 아군이라고 한때는 원나라와의 관계 개선을 시도했다. 그런데 원나라는 고려가 반원 자주 정책을 시작했던 것에 불만이 있었고 원나라 말을 안 듣는 공민왕 대신 덕흥군을 새로운 고려의 왕으로 옹립해버렸다. 결국 이 문제 때문에 문익점과 그 일행들이 사신으로 원나라에 갔고 공민왕의 반원 자주 정책에 반발한 원나라 조정에서 충선왕의 손자인 덕흥군을 고려 왕으로 임명해서 군사를 주어 고려로 보냈다.

이에 원나라 조정에 있던 사신들은 덕흥군을 왕으로 지지하는 파와 공민왕을 왕으로 지지하는 파로 나뉘었다. 1차 사신단은 기황후와 원나라 황실에 설득되어서 덕흥군 지지파로 임시 조정까지 꾸리고 앉아있었고 2차 사신단에 대해서 포섭이 이뤄졌는데 이들이 갈렸다. 이 중 대부분은 1차 사신단에 합류하였으나 공민왕을 지지했던 홍순, 이자송, 황대두, 김유는 돌아왔고 이공수는 붙잡혀 있으면서도 협력을 거부하면서 결국 덕흥군파의 움직임을 고려 조정에 알려서 공민왕이 이를 대처하는데 최대 공로를 세웠다. 그러니 이공수를 제외한 나머지 잔류 2차 사신 일행은 원래부터 자리잡고 있던 1차 사신 일행과 엮여 덕흥군파가 되었는데 잔류했던 문익점 역시 덕흥군파였다. 원나라가 보낸 덕흥군의 군대는 고려에 진입하다 압록강 근교에서 최영과 이성계에게 패배했고 결국 원나라는 이들에 대한 송환 결정을 내린다. 어쩔 수 없이 고려로 돌아온 후 문익점은 파직되어서 시골로 내려가게 된다. 문익점은 운이 좋은 것이라 할 수 있는데 문익점의 행동은 역모죄로 몰아서 여지없이 극형에 처해질 수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사형이나 유배가 아닌 파직으로 끝났기 때문이다.

파직 후 고향으로 돌아와서 딱히 할 것도 없으니 목화 재배를 시작해 목화의 개량과 보급에 있어 일대 혁신을 가져와 민간 백성들의 삶의 질 향상에 기여했다. 결국 1375년(우왕 1년) 조정으로 돌아와서 관직에 올랐는데 어디까지나 목화 보급 공로 때문이었다. 이후 다시 문익점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는데 온건파 사대부와 함께 하느냐, 급진파 사대부와 함께 하느냐였다. 그런데 이번에도 문익점은 정몽주 등 온건파 사대부와 입장을 같이 했는데 결국 급진파 사대부가 정권을 잡아 이들이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서 문익점은 이후 조선에서 관직에 오르지 못했고 조선 건국에 반대해 초야에 은거하며 여생을 보냈다. 그러나 그의 사후 조선 조정에서는 후손에게 벼슬을 주고 태종 때 참지부정사(參知政府事)와 강성군(江城君)의 봉호, 세종 때 영의정과 부민후(富民侯)의 봉호를 추증했으며 시호는 충선공(忠宣公)이다.

 

기타

우선 이 이야기는 기초적으로 원나라가 목화씨를 금수물품으로 지정했다는 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는데, 실제로 원나라가 금수품목으로 지정한 품목은 무기나 화약 등 국방에 있어 매우 중대하거나 희소성이 높은 품목일 뿐, 남쪽에 널리고 널린 게 목화인 만큼 희소성 없는 품목을 금수품목으로 지정했을지가 의문이다.

문익점이 들여온 것은 동북아시아 기후에 적응한 개량종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문익점 이전에는 재배의 흔적이 거의 보이지 않는 등 재래종의 수량이 극히 희소했던 것으로 보이기에 그 공로가 깎인다고 볼 수는 없다. 이는 목화 보급 100년 만에 조선 전체로 펴져나간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문익점은 목화의 대중화에는 상당 부분 기여했으며,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큰 공로다.

조선왕조실록의 문익점 졸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이 목화씨를 어디서 가져왔느냐가 관건인데, 당시 원 조정의 유배지였던 강남에서 가져왔다면 사행 중 뭔가 죄를 얻어 강남으로 유배를 가야 하는 상황이 있었다는 얘기며, 그냥 장강 이북이라면 그냥 길거리의 흔한 목화씨를 가져온 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로운 것을 도입하는 것과 이를 대중적으로 성공시키는 것은 별개 문제다. 문익점이 공을 인정받은 것은 개량종 목화씨 재배를 성공시키고 이를 대중화하여 백성들의 삶의 질을 개선시켰기 때문이다.

농사가 본업이 아니었던 사람이, 파직을 기회로 삼아 농사로 대박을 쳤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더 적절할텐데, 지나치게 최초라는 점에 초점이 맞춰진 나머지 재배 과정의 노력은 무시되어 버렸고, 억울하게 산업 스파이 이미지를 갖게 된 케이스라 할 수 있다.

 

의견

문익점이 유명해진건 목화씨 도입이 아니라 개량종 목화재배를 성공하고 대중화시켜 백성들의 삶의 질을 개선 시켰다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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