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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김유신 (삼한일통의 영웅)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by 디렉터 K 2022. 1. 19.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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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목자른 김유신~♬

김유신-동상
김유신 동상

title : 1971년_김유신동상 authr : 셀수스협동조합by site : 공유마당 저작권 위원회
is licensed under 기증저작물 자유이용

별점

역사적 중요도 명성 매력 특기
★★★★ ★★★★ ★★★☆ 전투, 정치

 

연대

595년 ~ 673년 7월 1일

 

업적

삼한일통의 대업을 이룬 명장

 

스토리

김유신은 금관가야 구형왕의 손자로 왕족의 후손이다. 구형왕이 532년 신라에 항복하였고 김유신은 595년 신라의 진골로 태어났다. 훗날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룬 신라의 최고의 명장이다.

그는 진평왕부터 문무왕까지 80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살며 다섯의 신라 왕을 섬겼다. 삼국통일등의 업적을 인정받아 '순충장렬흥무대'왕으로 추존되었고 신하에서 왕으로 추존된 유일한 인물이다.

 

김유신은 15세가 되는 609년까지 어린 시절에 대해 자세히 남아 있는 기록이 없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던 화랑(花郞)이 된 것이 15세의 일이었다. 그를 따르는 무리는 용화향도라 불렸고 용화향도를 이끌고 산천을 돌며 심신을 수련했다. 18세때는 화랑의 우두머리인 국선(國仙)으로 추대되었다.

 

진평왕 51년(629년)에 왕명을 받고 출전한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전투에서 고구려군에 크게 패한 신라군이 사기가 꺾이고 싸울 의지마저 잃게 되자, 김유신은 직접 나서서 적진을 오가며 적을 교란시키고 적군 장수의 목을 베어 가지고 돌아왔다. 다시 사기가 오른 신라군은 다시 고구려군과 싸웠고, 장수를 잃은 고구려군은 더이상 싸울 의지를 잃고 항복했다고 한다.

 

인평 11년(644년) 진골 귀족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관등인 소판(蘇判)으로 승진하였고 9월에는 상장군(上將軍)이 되어, 왕명으로 백제의 7개 성을 점령했다. 이듬해(645년) 정월에 다시 백제의 장군인 계백(階伯)이 매리포성에 쳐들어왔고 김유신은 승리를 거두었고 백제가 다시 3월에 쳐들어왔고 이마저도 격퇴했다.

 

진덕왕2년(648년) 백제에게 빼앗겼던 대량주를 공격하여 다시 수복하였고 백제의 12성을 함락시킨 공으로 이찬(伊飡)으로 승진한 뒤 상주행군대총관(上州行軍大摠管)에 임명되었다.

 

무열왕 7년(660년)에 그는 상대등으로 승진했고 6월 황산벌 전투를 승리하고 나당연합군과 합류하여 사비성을 함락하고 백제를 멸망시켰다. 

 

문무와 8년(668년) 대총관(大摠管)에 임명되었으나, 늙고 쇠약해진 데다 병까지 들어 직접 원정에 참가하지는 못하고 서라벌에 남았으며, 9월 26일에 나당연합군은 평양을 함락시키고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문무왕 13년(673년) 봄 정월에 황룡사와 재성 사이에 큰 별이 떨어지고 지진이 일어나 흉조가 일어날 것이 암시되었고  며칠 뒤 김유신은 자택에서 숨을 거둔다. 그때가 673년 7월 1일, 향년 79세였다.


흥덕왕 10년(835년)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존되어 사후 왕으로 지위가 격상되었다.

 

기타

말목자른 김유신?

청년 김유신은 신라의 절세미인이었던 '천관'의 미모에 반해 그가 운영하는 기생집에 드나들었고 그로인해 김유신은 방탕한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사실을 알게된 그의 어머니가 울면서 그를 책망하였고 그말에 뉘우친 김유신은 다시는 기생집에 출입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였고 어머니께 서약했다.

 

하루는 김유신이 술에 만취하여 집으로 돌아오는데 그의 말이 습관적으로 천관의 기생집으로 찾아가게 되었고 천관을 본 김유신은 깜짝놀라게되었고 자신의 결심을 헛되이 만든 말의 목을 배었다는 일화이다.

 

이 행동이 크게 본받을 행동인지는 독자의 판단에.....

 

의견

삼한을 통일시킨 명장 중 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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