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주대첩 강감찬~♬
Sasha Friedman, CC BY-SA 2.0, via Wikimedia Commons
역사적 중요도 | 명성 | 매력 | 특기 |
★★★☆ | ★★★☆ | ★★★☆ | 전략, 전투, 정치 |
948년 12월 22일 ~ 1031년 9월 9일
귀주대첩 대승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문관이자 지략가로 거란의 대군을 몰살해버린 귀주 대첩을 주도한 문신(文臣)으로, 동아시아 역사 전체에 영향을 미친 영웅이자 현종의 치세에 큰 도움을 준 명재상이였다.
강감찬은 지금의 서울특별시 금천구, 관악구 일대인 금주(衿州) 사람이다. 진주 강씨 중 인헌공파의 파조이기도 하며 오늘날의 서울특별시 관악구에서 출생한 관계로 인헌공파는 '금천 강씨'로 따로 분류하는 경우도 있다.
처음의 이름은 강은천(姜殷川)이었다고 한다. 강감찬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했다고 하는데, 983년(성종 2)에 시행된 과거에서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1018년(현종 9)에 거란은 소배압(蕭排押)을 지휘관으로 삼아 10만의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입했다. 이를 3차 여요전쟁 이라 부른다.
현종은 강감찬에게 군사 20만을 내어주고 거란군을 상대하도록 명령하였고 강감찬은 먼저 기병 1만 2천 명을 뽑아 흥화진(興化鎭) 근처의 산골짜기에 매복시키고, 성 동쪽의 큰 냇물을 소가죽을 엮어 막아둔 채로 거란군을 기다렸다. 그리고 거란군이 근처에 도달하자 막았던 물을 일시에 흘려보내고 복병을 출동시켜 큰 피해를 입혔다.
고려군의 기습으로 피해를 입었지만, 소배압은 계속 개경을 향해 거란군을 진격시켰고 고려군의 거듭된 요격에도 불구하고 소배압은 개경에서 백 리 떨어진 신은현(新恩縣)까지 도달하는 데에 성공했다. 하지만 국왕 현종은 이번에는 피난을 가지 않고, 성 밖의 백성들을 모두 성 안으로 들어오게 하고 청야 전술을 펼치며 거란군에 맞서 싸웠고 전세의 불리함을 느끼고 결국 소배압은 군대를 돌려 철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강감찬은 이들을 그대로 돌려보내지 않았거. 연주(漣州)와 위주(渭州) 일대에서 거란군을 요격하여 5백 명 이상의 목을 베고, 마침내 귀주 일대의 평야에서 거란군과 전면전을 개시하였다. 양군은 막상막하로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고려군이 승리하였고 패배한 거란군은 겨우 수천의 병사만이 압록강을 건너 철수 하였다.
이 전투를 보통 귀주대첩이라 부른다.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의 노래가사에도 있듯이 귀주대첩(龜州大捷)을 승리 이끈 장군이자 구국 영웅으로 대표되고 있지만 그는 실제 무신이 아니다.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나중에 문하시중에 오른 대표적인 엘리트 문관이다. 강감찬은 정식 무관직에 봉해진 적이 없고 거란과의 전쟁 때 받은 상원수 직은 임시 군단의 지휘관으로 품계가 있는 공식 무관직이 아니었다고 한다.
서울특별시 관악구 낙성대동에 ‘낙성대(落星垈)’가 소재해 있다. 낙성대는 고려시대의 명장 강감찬(姜邯贊) 장군이 태어난 곳이다. 강감찬 장군은 큰 별이 떨어지는 날 밤에 태어났으며, 임진왜란 무렵에는 왜군들이 그의 출생지 혈맥을 끊으려고도 하였다. 과거를 보고 한양판관이 되었을 때는 아전과 백성들이 호랑이에게 피해를 입자, 노스님으로 변한 호랑이를 꾸짖어서 호환을 없앴다는 설화가 전해지고있다.
문, 무, 기백, 청렴 등 모든 좋은 수식어가 어울리는 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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